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스웨덴/역사/바사 왕조 (문단 편집) ====== 빙상도하와 로스킬레 조약 체결 ====== 이후 덴마크의 내륙 영토인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유틀란트 반도]]를 장악한 칼 10세 구스타브는 나머지 덴마크의 섬들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그리고 12월 중순에 기록적인 한파가 몰려오며 바다까지 얼어붙자 칼 10세 구스타브는 공병 장교 에리크 다흘베르그에게 얼음 두께가 스웨덴군의 기병과 대포의 무게를 견딜 수 있는 지 조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동이 가능할 것으로 같다는 보고를 받자 이듬해인 AD 1658년 1월 30일 기병 9,000기와 보병 3,000명을 데리고 과감하게 소(小) 벨트 해협(덴마크어 Lillebælt)의 얼음을 도보로 건너서 건너는 빙상도하를 시도하여 [[퓐 섬]]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 때 얼음이 가라앉으며 병사들의 무릎까지 물에 잠겼으나 어쨌든 모두 무사히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또한 퓐 섬의 연안 지역에는 덴마크 수비병 3,000명이 있었지만 스웨덴군이 손쉽게 제압하였다. 이제 칼 10세 구스타브는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이 있는 [[셸란 섬]]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다시 한번 에리크 다흘베르그에게 다시 한번 대(大) 벨트 해협(덴마크어 Storebælt)의 얼음 두께를 조사시켰다. 그는 대(大) 벨트 해협을 곧바로 건너지 말고 랑엘란 섬과 롤란 섬으로 우회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이를 받아들인 칼 10세 구스타브가 또 한번 빙상도하를 실시하여 AD 1658년 2월 8일 무사히 셸란 섬에 도착했고 2월 15일 덴마크의 수도인 [[코펜하겐]]의 외곽에 도착했다. 덴마크로서는 봄이 되어야 스웨덴군이 공격해 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대혼란에 빠졌다. 결국 덴마크의 프레데리크 3세는 저항을 포기하고 강화 협상을 벌여 2월 26일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로스킬레 조약을 체결했다. 로스킬레 조약을 통해서 칼 10세 구스타브는 덴마크로부터 [[스코네]], [[블레킹에]], [[보른홀름 섬]]을 양도받고 30년간 조차 중이었던 할란드도 넘겨받았으며 노르웨이로부터는 부흐슬랜과 노르뫼레와 로스감을 포함한 트뢰네달라그의 소유권을 이전받는 데 성공했다. 그 뿐만 아니라 덴마크에게 모든 반(反) 스웨덴 동맹을 파기하도록 했고 장차 외레순 해협에 스웨덴을 적대하는 나라의 선박이 들어오는 것도 허용하지 말도록 했으며 칼 10세 구스타브의 처가이자 이미 반(半) 독립 상태에 있었던 홀슈타인-고토르프 공국에 대한 종주권도 공식적으로 포기하게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덴마크 내의 스웨덴군의 주둔을 허용받은 것은 물론 유지 비용까지 지불받기로 했고 향후 스웨덴이 덴마크 국경 근처에서 전쟁을 벌일 때 군대도 제공받기로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